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제국주의 (문단 편집) === [[냉전]] === ||<-4>(1) 군정에 대하여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 '''1위''' || '''기권''' || '''4,686명''' || '''98%''' || || 2위 || 위생 시설 || 96명 || 2% || ||<-4>(2)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무엇?|| || 1위 || 식량 정책 || 2,534명 || 53% || || 2위 || 산업 운영과 주택 관리 || 1,482명 || 31% || ||<-4>{{{-2 1946년 8월 11일 한국여론협회가 종로, 본정 입구, 노량진에서 통행인 4,7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35939054&referrerCode=0&searchKeyword=%EA%B8%B0%EA%B6%8C|출처]] }}} || [[냉전]] 시기에는 [[일본 제국|일본]]의 패망으로 독립한 조선에 들어와 자신들 마음대로 소련과 협상, 국토를 38선 중심으로 남북분단을 고착화 했다.[* 다만 이것은 관점을 달리 하면 오히려 미국이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공산주의로부터 지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한반도는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공세]]로 인해 전체가 공산화될 수도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8일 [[존 리드 하지]]가 이끄는 미군은 해방군으로 환영하기 위해 나온 조선인 2명을 사살했고, 9월 9일 총독부의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낸 뒤,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확실히 표명했다. 점령군으로 지배자가 된 미군정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전면 부정하고 총독부 행정을 유지하는 한편 친일파들을 그대로 요직에 두어서 민중들의 불만을 샀고, 고문조작 사건인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일으켜 독립운동가와 노동자에게 누명을 씌웠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좌우대립이 일어날 당시 그 과정에서 일어난 [[제주 4.3 사건]]과 [[대구 10.1 사건]] 그리고 [[여수·순천 10.19 사건]]을 우익들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친일세력 재기용은 미국 본국의 입장이라기 보다는 맥아더와 하지가 제멋대로 처리한 것에 더 가깝긴 하다. 이들, 특히 [[존 리드 하지]] 중장은 동아시아 정세, 통치술, 심지어 한국에 대해서도 무지했으나 [[낙하산 인사|군 행정상 편의]]로 한국에 군정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해방정국~미군정기 당시 만연하던 좌익 민족주의 세력의 확대를 경계했고, 미군정 수립 이전부터 존속했고 당위성이자 명분 그 자체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시한 독립군 계열이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경우 대부분 민족주의 성향을 띠는 임정, 독립군이 약하게는 미군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거나 심하게는 좌익 민족주의~공산주의 세력과 결탁하여 소련과 유착할 것을 경계했다. 이에 하지 중장을 필두로 한 군정청은 임시정부 세력의 정통성을 부정하여 세력을 일소하고, 정당창당을 사실상 자율화해 정당이 난립하는 정국을 조성하여 좌익 민족주의 세력을 꺾었다. 중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미-소간의 알력다툼, 신경전이 심화되자 미군정청은 최소한 단독정부를 수립할 남한의 좌익세력이라도 일소하기를 바랬고, 이에 부합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를 묵인(내지는 용인)했다.][* 여기서 미군정이 아닌 우익들이 한 일인데, 왜 미국에게 책임을 묻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구 10.1 사건의 진압을 명령하고, 미군 탱크까지 투입한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다. 제주 4.3에서의 진압도 브라운 소령의 명령과 작전에 의한 것이고, 여순사건도 제임스 하우스만과 같은 미군사고문단이 개입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들에서의 미국 개입은 분명했고, 실제로 미군들이 세운 작전이 우익들이 무자비하게 민간인을 진압하고 학살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미군정 기간을 거치며 소위 6.25 전쟁 이전의 작은전쟁을 통해 대략 10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정 하에서 목숨을 잃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비록 소련이 북한에서 저지른 것과 같은 규모에 이른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군도 남한에서 여러 종류의 약탈을 자행했다. 뿐만 아니라 미군 점령 3년 동안에 강간의 보고들은 계속 되었으며, 1945년에는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의 일부 건물이 미군의 병영으로 징발되어 그 결과로 도서관과 연구실에 많은 약탈과 파괴가 행해졌다. 또한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오는 난민들의 금품을 몰수했다는 증거는 그것이 상습적이었음을 암시할 정도로 많다. 이러한 행위가 미군 점령의 일반적 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한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주의는 도처에 퍼져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개전 책임이 북한에 있는 것과는 별개로, 미국이 수행한 전쟁방식은 민간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고려가 없었으며 박태균 교수가 <한국전쟁>이라는 저서에서 언급했듯이, [[오리엔탈리즘]]적 성격도 강했다. 하얀 옷을 입은 민간인은 인민군이다는 식의 생각을 미군들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게 해서 벌어진 비극이 바로 [[노근리 학살 사건]]이었다. 그외에도 미국은 한국과 북한 할 것 없이 무차별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폭격]]을 감행했다. 1950년 6월 29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효과를 발휘하는 시점까지 미국은 북한을 폭격했다. 그 결과 최소 1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심지어 1950년 11월 8일 신의주 폭격 당시 당일 폭격으로 5,000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80%인 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었다. 원산만 하더라도 1950년 7월 당일 폭격으로 1,24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평양 또한 6월 29일부터 폭격을 받았고, 1952년 여름 2일간의 폭격으로 최소 6,000~7,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을 비롯한 폭탄에 희생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따져 보았을 때,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군사정책은 민간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차별 폭격을 미국이 감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이러한 군사정책들은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도 나타난다. 1946년 [[중국 국민당]]의 선공으로 시작된 [[국공내전]] 때는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던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원했다.[* 다만 국민당인 경우는 쉴드라도 칠 수 있는게, 적어도 [[중일전쟁|일본 상대로 피를 엄청 흘렸다는]] 요소라도 있었다. 문제는 그놈의 부패 때문에 힘을 키운 [[중국공산당]]에게 제대로 박살이 나버린 것.] 1947년 10월 미국은 국민당에게 2,77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해줬다. 1947년 말 장제스는 미국에 4년간 15억 달러를 원조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트루먼은 1948년 2월 18일 5월 7,000만 달러를 지급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었다. 미국은 장제스 정권에게 막대한 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부패한 장제스 군대에게 20억 달러나 원조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와 장비로 전투를 전개했지만, 미국제 탱크와 항공기, 대포로 무장했음에도 중국 공산당에게 패배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을 점령통치하는 과정에서도 미국은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일본 본토에 미군이 주둔했으며, 더글라스 맥아더를 중심으로 GHQ가 창설됐는데, 이후엔 도쿄 군사재판도 열고 일부 전범들이 처벌받기도 했으나, 대다수 전범들은 살아남았다. 731 부대로 유명한 이시이 시로 같은 전쟁범죄자들이 맥아더와 결탁하여 살아남았다. 이시이 시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맥아더에게 731 부대의 연구 자료들을 넘겼기 때문에. 미국은 1946년과 1947년, 1949년, 1952년에 치러진 조기 선거를 지도했다. 맥아더가 통치하는 미점령군은 극우 세력(자유당)과 자유주의 세력(민주당)이 연정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대적하도록 만들었고, CIA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은 민주당과 자유당이 함께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 민주자유당이 바로 1955년 일본의 자유민주당 즉 자민당이 됐다. 맥아더의 일본 점령에서 일본 공산당을 포함한 잔존한 좌파 조직들은 반미투쟁을 전개했는데, 당연히 맥아더 정부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는 한때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이들이 이후 정치인이 된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필리핀]]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지지를 받자 미국은 이들의 시도를 분쇄했다. 소위 후크발라합으로 대표되는 필리핀의 좌파세력들은 일본에 맞서 싸웠지만, 맥아더의 필리핀 점령이 시작되자, 탄압받았으며 미군정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결과 필리핀에는 마르코스로 대표되는 우익 독재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는 나치의 지배를 받았었고, 당시 [[그리스 공산당]] 휘하에 있던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는 나치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1944년 나치가 물러난 이후 영국이 들어왔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대신해서 미국이 그리스 내전에 개입했다. [[그리스 내전]] 당시 미국은 그리스 사회주의 세력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소위 왕당파들을 지원했고, 이 왕당파 세력의 대다수는 과거 나치에게 협력했던 이들이었다. 미국은 수백 명의 군사 고문단과 수만 톤의 전쟁물자를 이들에게 지원했으며, 초토화 작전, 네이팜 폭격, 노조파괴, 주민들 강제소개 등 이후 제주 4.3 사건과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하게 될 인권 유린 및 학살적인 전술을 그리스 내전에서 이용했다. 이에 따라 10~15만 명의 그리스 인이 사망했고, 80만 명이 난민이 됐으며, 1949년에 우익 독재정부가 그리스에 건설됐다. 우익 독재정권은 1974년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지속됐다. 미국의 내정간섭 및 개입은 트루먼 독트린을 전후로 하여 가속화된 측면이 있는데,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자, 과거 무솔리니 휘하에 있던 파시스트 출신들을 규합하여, 이들의 집권을 막았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도 스테판 반데라나 미콜라 레배드 같은 대량 인종 학살자들을 이용하여 소련 영토에서 각종 비밀작전들 즉 소련을 내부에서부터 흔들기 위한 목적에서 이러한 작전들을 전개했다. 미국과 이들의 관계는 1946년부터 굳건했고, 이들은 반소 반공 투쟁에 이용했다. 1949년부터 1954년까지 OUN 출신들을 비롯한 나치주의자들의 공작행위는 5년간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나치주의자 잔존세력들은 최소 3만 5,000명이나 되는 소련 군 간부와 당 간부 그리고 민간인을 살해했다. 즉 미국은 반공주의라는 미명하에 과거 파시즘과 연관이 있던 이들을 이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이탈리아나 소련 치하의 우크라이나에서 그랬듯이 실제로 민주주의적인 가치에 어긋나는 방법을 통한 내정간섭을 냉전 초기에도 일삼았다. 1945년 [[알바니아]]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이후 총선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민주전선으로 출마해 전 의석을 획득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온 선거 감시단은 이것이 공정한 선거였음을 마지못해 인정했지만, 물론 이 미국과 영국에서 온 선거 감시단이 선호한 알바니아 후보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에게 부역한 [[파시스트]] 협력자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후보에게 표를 던지려는 알바니아인은 아무도 없었고, 이후 냉전 초기 영국과 미국은 비밀리에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 인민 사회주의 공화국]]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영국의 경우 1946년부터 알바니아의 사회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실질적인 정치공작 행위를 실행한 것은 1949년부터였다. 미국의 CIA와 영국의 MI6는 과거 파시스트들에게 협력한 조그왕 지지 인사들을 알바니아에 침투시켰으며, 이 요원들의 경우 말타와 영국 그리고 서독에 있는 기지에서 훈련받았다. 그리고 이 작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지원한 이탈리아도 협력했다. 흥미롭게도 이 비밀작전의 대부분은 실패했으며, 1952년 봄이 되서야 종결됐다. 대략 300명 이상의 MI6와 CIA가 침투시킨 요원이 사살됐고, 또 적잖은 요원들이 체포되어 알바니아 감옥에 수감됐다.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한때 자신들의 동맹[* [[호치민]]의 [[베트민]]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에 맞서 싸웠다.]이었던 [[호치민]]의 요구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는 프랑스에게 전쟁 비용을 지원했다.[*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프랑스가 미국을 오히려 협박한 점도 있다. 미국이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면 프랑스는 바로 소련과 손을 잡겠다고 협박한 것.] 한국전쟁이 시작되던 1950년 6월 베트남국의 수도 사이공에 소수의 미군사고문단이 입성했고, 트루먼 행정부는 시작부터 바오다이 꼭두각시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1,000만 달러를 원조했다. 이러한 미국의 원조는 1951년부터 지원을 시작하여 1954년에는 전비 80%를 지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량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베트민 기지를 폭격하고, 전술핵 3발을 투하하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었다. [[베트남 공화국]]을 [[공산주의자]]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을 세워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을 지지했고,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통일을 위한 총선을 실시해야 했으나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949년 프랑스가 형식적으로나마 세운 꼭두각시 정부인 바오다이 정부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와 제네바 회담 당시에도 존재했었는데,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의 반공주의 정책은 대중성이 전혀 없는 친불 꼭두각시 정부인 바오다이 정부를 지원하는 것이었으며, 바오다이 정부로는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1954년 이후부터 미국에서 반공 가톨릭 인사들과 인맥을 형성한 응오딘지엠 정부를 지원하고, 또 친미정부를 세운 것이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초기에 대락 12,000명 이상을 처형했으며,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구금했다. 이러한 백색테러 적인 정책은 1960년대 케네디 정부에 와서 더 확장되었으며,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 내전 시기의 전술이 더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더 나아가 네이팜 폭격과 에이전트 오렌지로 대표되는 맹독성 고엽제를 무차별 살포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사실상 그 나라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빨갱이'로 설정해놓고, 작전으로서의 학살을 동반한 군사작전을 헬기와 장갑차 그리고 탱크와 항공기를 동원한 최신식 무기를 사용해가며 전개했다. 심지어 미군고문단 출신이자 역사학자인 제프리 레이스에 따르면, 응오딘지엠 정부 시절의 양민 학살은 초기 베트민이나 베트콩이 선별적으로 자행한 테러나 학살보다 규모나 잔인성 면에서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이런 양민학살 정책은 대다수 농촌 농민들(특히 메콩 델타 지역)이 베트민과 베트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1964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통킹만 사건]]을 일으켰다는 조작[* 통킹만 사건 자체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맞다. 없었던 2차 공격을 일어난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을 동반한 명목으로 [[베트남 전쟁]]을 확전하며 개입했으며, 대규모 미군부대가 투입된 시점에서 이러한 무차별 살상의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해 졌다. 1968년 3월 16일 5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4시간 동안 학살한 미라이 학살은 진상규명이 될 학살일 뿐, 1971년 초 기자들에게 여단 정도 크기의 모든 미군 부대는 어딘가에 각자의 미라이를 숨겨두고 있다고 얘기했을 정도다. 즉 이러한 학살행위는 소위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가 설정한 자유사격지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부터 1972년까지 미국은 북베트남을 대상으로 무차별 북폭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 시기 호치민 사후 북베트남의 지도자가 된 레주언에 따르면, 북베트남을 대상으로 핵폭탄 투하 협박만, 최소 13번 이상 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던 1972년 라인배커 작전 때도 닉슨은 핵폭탄 투하를 공공연하게 헨리 키신저에게 주장했었다.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로버트 맥나마라 추산에 의하면 미국에 의해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다.[* 로버트 맥나마라는 1995년 아메리칸 대학에서 이러한 자신의 추정치를 언급했고, 이후 베-미 수교 및 경협 과정에서 만난 통일 베트남측 인사들과의 대화에서도 롤링썬더 작전 3년 기간 동안 1년에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사망했다고 말했다.(참고 자료는 올리버 스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와 <적과의 대화>) 또한 1995년 베트남 노동사회부에서 추정한 베트남 전쟁 사망자 추정치는 군인 100만 명과 민간인 400만 명이 죽었다고 추정했는데, 북베트남에서 200만 명 남베트남에서 200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추정했다. 만약 이 추정치가 사실이면 북베트남 민간인 200만 명은 8년간의 폭격 기간 동안 직접적인 사망과 간접적인 사망(부상 후 사망을 포함한 여러 요인으로 사망)을 합쳐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셈이다.] 베트남 전쟁을 조작하고 개입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도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으며, 라오스에서는 35만 명이 사망했고, 캄보디아에서는 최소 40만에서 많게는 80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미국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투하한 폭탄의 양은 750만 톤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사용한 폭탄보다 3.5배나 많은 양이었다. 순수 폭발력으로만 따지면,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보이를 600개 이상 투하한 정도의 폭발력이다. 아무리 공산주의자를 잡는다는 명분이 있었다고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국가들에게 이렇게나 많은 폭탄을 투하했다는 점에서 심히 그 도덕성이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캄보디아에서는 미국이 군사적인 침공을 감행하기도 했다. 1969년 닉슨은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베트남에서 단계적인 철군 절차를 따랐는데, 1970년 베트콩 소탕을 목적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캄보디아를 침공함으로써, 제3세계 노선을 추구하던 노로돔 시아누크 정부를 전복시키고, 친미성향의 군부 지도자인 론 놀을 중심으로 친미정부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에 무차별 폭격이 이어졌고, 수십만 명이 사망하자 대다수 캄보디아인들이 이후 킬링필드를 저지르게 될 주체인 폴포트와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게 되는 역효과를 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인도네시아에서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치공작 및 내정간섭 행위가 지속됐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가인 수카르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에 맞서 무장투쟁 및 협상을 전개하여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쟁취했지만, 1955년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가 제3세계 노선을 천명하면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제재와 정치공작을 자행했고, 1960년대 초반부터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반미정서가 강해졌다. 이렇게 되자 수카르노는 더더욱 반미적인 노선을 표명했는데, 그 결과 1965년 미국은 군부 장성중 하나인 수하르토를 통해서 쿠데타를 획책했다.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미국의 CIA는 수하르토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미국의 지원을 등에업은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대학살을 전개했다. 그 결과 최소 100만 명에서 많게는 300만 명의 민간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다. 이 중 10~20만 명은 현재 제주도처럼 휴양을 위한 관광지인 발리에서 죽었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의 국가 [[태국]]에서도 반공활동을 했다. 이는 [[라오스 내전]]과 연관이 있다. 1962년 7월 미 해병대가 태국 방콕에 도착했고, 도착한 병력의 목적은 CIA로부터 훈련 받은 반공 민병대와 태국 경찰을 보강해 전쟁을 벌이고, 인근의 라오스에 있던 공산주의 세력인 [[빠텟라오]]와 함께 1961년부터 무장투쟁을 시작한 [[태국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은 과테말라에서 임무를 마친 전직 CIA 외교관 존 퓨리포이를 태국으로 파견해 작전을 감독하고 [[사릿 타나랏]]이 이끄는 군부가 집권할 수 있도록 했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는데, 미국은 태국 군부세력에게 무력을 빌려주어 이들을 진압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그 대가로 태국이라는 반공진영의 동맹세력과 군 기지를 획득했다. 이에 따라 태국은 베트남 전쟁 기간 내내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를 폭격하는 미국의 군사기지가 되었고 실제로 그 역할을 했다. 실제로 [[태국군]] 또한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한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살을 벌이던 친미 반공주의자 수하르토는 미국하고 가까우면서도, 베트남에 병력을 파병하지 않았다.] 냉전 시기 미국은 [[반공]]을 내세워 [[쿠바]]의 바티스타 군사정권의 지원을 시작으로[* 결과적으로 이는 오히려 쿠바가 공산화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비롯한 [[중남미]]의 군부 [[쿠데타]]를 지원해 [[친미]] [[군사정권]]이 세워지게 한다. 1970년 칠레에서 세계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정권을 잡자 미국의 닉슨 정부는 이를 전복시키기 위해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도왔고, 그 결과 아옌데는 쿠데타 군대에 맞서 싸우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 칠레에는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며 공산주의자 색출을 단행한 당일부터 수개월 기간 동안 경기장에서 최소 3,200명을 학살하며 시작했고, 피노체트가 집권한 군사독재 정부 기간 동안 최소 3만에서 6만 명이 그런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이후 중남미 국가들에서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된 이후, 많은 중남미 국가들이 친미 진영에서 [[반미]] 진영으로 돌아서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나 1970~8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칠레]] 6개국의 공동 공산주의 척결 운동인 콘도르 작전으로 5~10만명 정도 되는 남미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잔혹한 고문에 시달렸는데, 이것을 미국 CIA가 지원했다. 특히나 [[과테말라]]의 경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친미 정부의 학살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1954년 아르벤스가 실각한 이후 친미정부가 들어서자 1960년부터 쿠바와 니카라과의 지원을 받은 좌파 반군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1996년까지 자그마치 36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었다.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는데, 이 보고어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이나 됐다. [[엘살바도르]] 또한 미국이 지원한 우익들과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폭력과 학살을 경험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자국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을 게시했는데, 리오삼풀(Rio Sumpul)의 대규모 학살 사건의 경우,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군대가 벌인 이 학살로 최소 600명이 죽었다. 1981년 레이건 행정부로 넘어오면서 엘살바도르 친미 정부에 의한 인명 피해는 13,000명을 초과했으며, 친미정부 기간을 통틀어 백색테러와 학살로 최소 7만 명 이상의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50만 명에 가까운 엘살바도르 국민이 미국 이주를 시도했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지역에서는 CIA가 서유럽 정보기관들과 협력해 미국의 영향력을 공고히하고 서유럽 내의 공산세력들을 척결하기 위해 [[https://en.wikipedia.org/wiki/Operation_Gladio|글라디오 작전]]을 시행했다. 미국과 서유럽 정보기관들은 극우 세력들을 이용하여 공산세력들을 공격하였으며, 공산주의 세력으로 위장하여 테러를 유발하기도 했다. 공산세력으로 위장하여 테러를 유발한 이유는 '가짜 깃발 작전(False-flag operation)'의 일종으로 공산세력들이 대중의 민심을 잃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위해서다. 글라디오 작전으로 수백명의 서유럽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냉전]] 말기에는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그레나다]]와 [[파나마]]를 침공([[그레나다 침공]]&[[파나마 침공]])하여 [[반미]]정부를 몰락시키고 [[친미]]정부로 교체했다.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소위 이란 [[이란-콘트라 사건]]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이란에게 무기를 팔고, 그 자금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콘트라 우익 반군을 지원했다.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을 통해 소모사 독재정권을 축출하고 니카라과에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카터 정부때부터 극우 성향의 군부를 지원했는데, 이들이 콘트라 반군이었고, 콘트라 반군은 로널드 레이건 정권기 CIA의 대대적인 도움을 받아 학살, 고문, 폭행, 강간, 사지절단 등과 같은 악행들을 저질렀으며, 수만 명이 콘트라 반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들이 학살을 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지가 니카라과가 아닌 온두라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로널드 레이건은 이들을 '''자유투사'''로 치켜세웠다. 1986년에는 카다피의 리비아 정권하고 갈등이 있자, 리비아를 공습하여 카다피를 암살하려 했었다.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는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났다. 아프리카의 모잠비크에서는 CIA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보안대가 조직한 레나모(Renamo)가 1980년 이래로 90만 명의 마을 사람들을 대량학살하고 굶어죽게 했으며, 이들의 목적은 모잠비크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독립된 국가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또한 CIA는 1975년에 일어난 앙골라 내전 당시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를 진압하기 위해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으로 불린 유니타(Unita)를 지원해 내전 기간을 통틀어 100만 명 이상의 앙골라인을 죽였다. 이때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벌이 사빔비(Savimbi)였고, 사빔비는 1992년 선거에서 패배한 후 다시 파괴적인 전쟁을 지속했던 인물이었다. 그 외에도 미국은 소련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반인륜적인 행동을 한 집단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유럽에서는 소련에 대하여 독자노선을 걷던 [[루마니아]]의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차우셰스쿠 정권]]에 우호적으로 대하였으며 동남아시아에서 [[베트남 전쟁|베트남에게 복수]]한다면서 캄보디아를 폭압통치하며 말아먹은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였으며 서아시아에서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의 CIA가 주도하여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행각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성장해서 [[9.11 테러|미국의 심장부를 직격하게 된다.]] ] 결과적으로 이 때 미국이 자유수호와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지원한 세력이 이후 [[탈레반]]이 됐고, 이들은 결국 2001년 9.11 테러를 기점으로 미국에 맞서 싸우게 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